살며 생각하며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며

OappleO 2017. 3. 19. 02:44

올해로 100세가 되신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


지금껏 20여년을 세째 누나가 모시고 있었는데, 이제 연세도 있고 해서 가끔 대소변 처리시 행동이 굼떠서 실례를 하기도 하셨단다. 또 가끔은 치매끼를 보이며 한밤중에 밥을 달래기도 하셨단다.

또 누나도 이제는 66세여서 힘에 부친다고 한다.

네째 누나가 나서서 말문을 터서 두어 번 망설이다가 일주일여 전에 요양원에 모셨다.

나는 어제서야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다녀왔다.


이런 가정사에 왜 사정이 없겠나!

큰형이 있고, 띠 동갑인 작은형도 있었지만 췌장암 수술 후 4년여 투병하다 4년 전에 먼저 돌아가셨다. 둘째 누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내가 열 네 살인 중1 봄에 돌아가셨으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한 결혼 기간보다 더 긴 세월을 혼자 사신거다.

둘째 누나는 출가 후 1남1녀를 두고 부모님 생전에 돌아가셨고,

작은형이 죽은 것은 어머니에게도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이 죽기 며칠 전에 그간 참빗으로 곱게 빗던 쪽진 머리를 자르셨다니 이미 작은형의 죽음을 예감한 것이 아닌가 하고 형제들끼리 말했다.


큰형은 소위 “용헌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고, 엄마나 고모들도 사람만 “용해빠졌다”고는 말했다.

집안에 사람이 잘 들어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집안 망한다는 소리가 있지만,

큰형의 아내가 그런 사람이다. 화투로 부모가 일군 적지 않은 재산을 탕진했다.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우리 집에 왔다.

오로지 엄마가 서두르고 애태우며 마련한 중매로 선을 보아 약혼까지는 했는데, 큰형은 매달리고 여자는 싫다고 결혼을 거부하는걸 작은형이 나서서 감언이설로 결혼하게 했다고 후에 원망하는 말을 했더랬다.


작은형은 당시 그 시골 근동에는 없는 대학생, 한국해양대의 그 제복을 입고 다니면 180의 훤칠한 키와 용모에 보기 드문 주목을 끌었다. 자나가는 트럭(석탄 운반 트럭)을 세워 타고는 읍내에 다니곤 했다. 

이 때 큰형은 동네 뒷산의 광산에 다니며 벌은 돈을 작은형에게 보태준 모양이다.(그런데 해대는 국립에 기숙사 생활로 무료 아니었을까 하는데, 돈이래야 용돈 정도 아니었을까 한다.)

하긴 작은형이 해대에 입학하고는 신원조사차 해대에서 한 사람이 우리집에 왔다간 기억이 있다. 이 때 거마비 조로 돈을 쥐어주는걸 본 기억도 있다.

어쨌건 큰형은 국민학교만 마치고 동네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이나 지방 쓰는 법 같은 것을 배우고는 농사에 탄광 광부로 지내고

작은형은 읍내 중학교를 거쳐서 근동의 홍성고등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또렸한 기억인데, 주말에 집에 왔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갈 때면 엄마가 쌀자루를 이고 함께 읍내 장보러 다니던 장고개를 넘던 장면이 선명하다. 읍내 기차역까지 머리에 이고 가져다 주신거다. 하숙을 했던거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형은 큰형을 많이 생각하고 배려했다. 재산 상속에서도 누구도 손도 못 댔고 그대로 큰형이 다 상속받았다.

난 결혼하며 방 한 칸 얻기 위해서 집에 딸린 텃밭을 팔 때 1,000만원을 달라고 해서 받았다. 이 집은 내가 중1 봄에 읍내로 이사하여 살던 집이다. 이 때의 이사도 작은형이 주동해서 했다. 살던 시골은 두세 개(김, 양, 조) 성씨의 집성촌이어서 우리집은 좀 외톨이였기도하였다. 그래서 일가들이 좀 있는 읍내 동네로 이사했다.


읍내로 이사해서도 큰형은 읍내 뒷산의 광산에 다니며 농사도 지으며 했다.

이 때 야간조로 광산에서 일 할 때면 여자는 동네 여자와 함께 모처의 아지트로 가서 밤새 노름을 하곤했다.

이러며 고부간에 갈등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작은형네서 머무르기도 하셨다. 이렇게 엄마가 부재중이면 그녀의 노름질은 도를 더해갔다. 나도 중1 말에 서울로 전학시켜달라고 작은형에게 부탁하여 쭉 작은형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작은형의 여자도 시어머니와 원만하게 지내지 못 했다. 그래서 엄마는 서울의 둘째 아들네와 시골 읍내의 큰아들네를 왔다갔다 했다. 이런걸 보면서 나도 마음이 울근불근해서 공부에 매진할수 없었다.


결국 큰아들네도 작은아들네도 있을수 없게된 엄마를 셋째 누나가 모시게되었다.

이 당시가 되면 엄마는 평생 한 농사 일로 무릅이 망가져서 제대로 걸을수 없는 상태가 되어 앉은뱅이 생활을 하는 수준이었다.

이 상태에서 20여년이 흘러 2~3년 전부터는 엉금엉금 기어나가 가꾸던 텃밭 일도 못 하고 1년여 전부터는 몸져누워 계시다 이 번에 요양원에 가시게 되었다.


어제 요양원 갔을 때 마침 세째 누나도 와 있었는데, 엄마가 자꾸만 집에 가야된다며 짐을 챙기라고 해서 맘이 아팠다.

기저귀 가는 틈에 누나는 돌아가고 난 좀 더 있다 따라 나서려는 엄마를 억지로 눕히고는 돌아섰다.

구식으로 거실도 없는 비좁은 빌라에 사는 나로서는 엄마를 모실 공간이 없으니 어쩔수 없다며 자위하고 있다.

형제끼리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요양비를 대는 것으로 면피하고 있다.


이 지경에 이르러 부모도 모실수 없는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